애플병이라는 말이 있다. 감각적인 디자인에 섬세한 마감, 화룡점정의 사과 로고를 보면 아무리 사악한 가격일지라도 그것을 구매하기 전까지는 낫지 않는 다는 병이다. 이해할 수 없다, 한심하다 할 수도 있지만 같은 병을 앓은 동지끼리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강렬한 끌림은 책에서도 가~끔 느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제목 한줄 보고 구매하냐고 또 누군가 말할 수 있겠지만 그냥 그 하나로 끌리는 걸 어찌할까? 바로 구매를 한 건 아니었지만 언젠가 꼭 구매해서 읽고 만다는 생각을 세번 정도 되새겼다. 그리고 여러권의 책을 쇼핑하며 이 책을 함께 집어들었다.
알랭 드 보통이 저자이며 영어 제목은 'Essays in Love' 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번역가에게 감탄했다. 요새 AI의 습격이다 뭐다 하며 많은 일자리가 대체될 것이라는 걱정을 많이 하는데 물론 나도 아주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AI는 죽었다 깨어나도 제목을 이렇게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책의 표지에 제목이 Essays in Love 라고 적혀 있었다면 나는 책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로맨틱하고 철학적인 듯한 느낌을 풍기는 훌륭한 한글 제목을 지어주신 덕분에 구매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이 책은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부터 사랑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이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정말 오래 전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찾았던 단골 소재이다. '사랑' 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단어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보면 정말 무릎을 탁 치게 할 정도로 공감가는 생각들이 몇개 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사랑의 인과관계' 이다. 사랑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내가 상대방을 만날 확률은 지구 저 먼 하늘에서 깃털 하나를 떨어뜨려 그 깃털이 내가 서 있는 머리 꼭대기에 안착할 확률과 동일할 것이다. 그 정도로 고귀하고 소중한 인연인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면 그 감정은 나를 완전히 압도한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어쩐지 가벼운 느낌이고 지나가다 사랑 노래가 들리면 괜히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다 내 얘기인 것만 같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때마저도 이렇게 좋은데 만날 때는 또 어떨까.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고 아무 것도 아닌 얘기에도 웃게 된다. 바이러스 혹은 마약같은 행복감에 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내가 열심히 몇달 동안 노력해서 자격증 시험을 쳤고 결국 시험에 합격에서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것은 정당한 내 노력에 따라오는 성과이고 온전히 그것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다르다. 우주같은 확률로 상대방을 만난 것이긴 하나 내가 뭔가 노력해서 이뤄냈다고는 볼 수 없다.(물론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도 표현 할 수 있으나 그것 또한 우주의 확률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로 인해 누리는 행복은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랑은 비교할 수가 없다.
이런 성질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수록 한편으로는 불안감 또한 생기게 된다. 둘 중 한명의 마음만 변하더라도 이런 압도적인 감정이 한순간 끝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불공평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서 저자는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상대방과 싸웠다고도 했다. 별 사소한 이유로 싸움을 걸고 그 싸움으로도 우리는 헤어질 수 없다는 강렬한 느낌에 안정감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불안감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매력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기는 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감추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불안, 의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 꾹꾹 밀어넣고 나약하고 미숙해 보이는 행동들도 애써 바꿔보려 했다. 효과적이라고 보여지진 않았으나 그것마저도 모두 사랑에 빠진 나의 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사랑이 진행되면 이제 상대는 나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쉬는 날엔 만나서 여행을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좋은 감정을 나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부터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카톡은 이어진다. 익숙함은 점차 압도적인 사랑의 감정을 점차 잔잔한 물결처럼 만들어준다. 저자는 이때쯤 다른 매력적인 여성이 눈에 들어오면 그녀와 내가 이어질 수도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자신의 연인에게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괜히 시비를 걸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눈, 코, 입부터 시작하여 머릿결, 치아의 배열과 앞니의 벌어짐, 코를 파는 사소한 습관등을 하나 하나 알아갈 때 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나도 그런 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사랑의 모양이 바뀌어갈 뿐 사랑이 식는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다. 나의 일부가 된 상대방을 보며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랑은 종착지가 있다. 그 종착지에 다가올수록 서로는 그것을 느낀다.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태도, 눈빛, 말투 등을 보며 느끼게 된다. 마음이 떠난 상대를 바라보는 아직 사랑하는 상태인 사람은 저자에 표현에 따르자면 '낭만적 테러리스트' 가 된다. 보통 테러리스트는 상대방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부유한 집안의 딸을 납치한 납치범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10억을 안주면 딸은 죽는다.' 라는 협박을 할 때, 납치범에게 아버지가 딸을 잃은 슬픔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의 낭만적인 테러리스트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질투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괜한 심술을 부리며 상대방의 관심을 구걸한다. 결국 '나를 다시 예전처럼 사랑해줘.' 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테러를 일으켜 설령 상대방의 관심을 얻었다고 해도 '내가 사랑을 구걸하니까 관심을 주는구나, 하지만 이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역설로 인해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절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결국 연인 클로이는 저자의 친구와 바람이 나서 헤어지게 된다. 그 사실에 감정이입해서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환승이별을 당한 적은 없지만 내가 꼭 당한 느낌이 들어서 비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나의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는게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상대방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이 환승 이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뿐 결국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상실의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죽을 생각까지 한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연인인 클로이가 죽은 내 모습을 보고 정말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정작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 생각들을 보며 저자가 좀 '큐트' 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이 책을 집필했을 때가 스물다섯이었다고 한다. 이런 젊은 나이에 이런 깊은 폭 넓은 지식과 생각들이 글에 녹여져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부분이 이렇게 희끄무레하게나마 남아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반갑다.
그러나 이런 고통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잊혀져 간다. 이별을 극복하는 부류는 총 세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낭만적 실증주의자' 들이다. 이들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차가운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사랑을 바라본다. 예를 들면 이별을 할 때 마음이 너무 힘들고 눈물이 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자율신경계와 스트레스 호르몬의 작용이 신체 통증에 가까운 감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관점을 실연으로 인한 깊은 슬픔을 겪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두번째는 사랑에 대해 단절해버리는 사람들이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별을 하지 않고 아픈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근본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다만 사랑을 하며 느끼는 행복감을 포기할 수 있을때 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절식남' 이라고 불리는 결혼은 커녕 연애도 하지 않는 남자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물론 절식남들이 사랑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때문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랑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낭만적 실증주의자의 관점을 대입해보고 싶다. 인간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이성과의 관계는 그 관계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것을 이별이 두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려워 그 자리에 멈춰있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힘이 들면 쉬어가고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받는 동안 멈춰 서있는 일은 있을지라도 회복이 끝나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세번째 부류로 이어진다. 이별이 정말로 아프고 두렵지만 그것까지 끌어안고 계속해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다. 뜨거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사랑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으로 태어남에 있어 자신의 본능과 의무를 충실히 다하는 건강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이별을 온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한 에너지와 회복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봤던 '엣 더 벤치' 라는 영화에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아픈 만큼 행복했다는 것. 이별이 그만큼 아프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사랑했다는 반증이니까 오롯이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보고 공감하고 싶다면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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